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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사학

명대 및 청대 공필 인물화

by everything-yeah 2022. 7. 17.

명나라 전기의 궁중 회화에서 인물화는 산수화나 화조화보다 유행하지 못했다. 인물화의 소재는 주로 황후의 초상화와 행락도, 황제의 정치와 군사상의 공적 칭송, 신하들의 충성심 표현 등 세 부류로 나뉘었다. 중기의 문인화는 오문을 중심으로 오문화파를 형성했다. 오문사가吳門四家 심주沈周, 문징명文征明, 당인唐寅, 구영仇英 중 당인과 구영은 특히 인물화에 능했다. 인물화는 기존의 섬세하던 것이 흐릿하게 변했으며 그림의 생기가 점차 사라졌다. 그럼에도 몇몇 훌륭한 인물화가가 속출했는데, 대표적 화가로는 남진북최南陳北崔와 증경曾鯨을 중심으로 하는 파신파波臣派였다. 봉건사회 후기인 명대에는 회화의 복고 경향이 두드러졌으며, 문인화에서 제창하던 개성의 표현도 한층 더 발전했다. 그중 진홍수는 독자적으로 한 파를 이루었 는데, 그의 공필 인물화는 이공린을 본떠 조형이 과장되고 우직하면서도 고상하며 독특한 풍격을 띠었다. 증경의 서양화법을 가미한 초상화는 새로운 느낌을 물씬 풍겼다. 대표적인 작품으로는 상희商喜의 <선종행락도宣宗行樂>, 유준劉俊의 <설야방보雪夜訪普> 등이 있다. 당인唐寅(1470~1523) 자는 백호伯虎, 자외子畏, 호는 육여거사六如居士, 도화암주桃花庵主이다. 명나라 소주부 오현吳縣 출신이며, 어릴 때부터 재능이 뛰어나 홍치弘治 11(1498) 거인제일擧人第一로 합격했지만, 회시會試 때의 일로 투옥되고 처벌을 받아 하급관리가 되자 부끄러워 나가지 않았다. 벼슬에서 물러난 뒤 명산대천을 유람하다가 소주에 은거하여 시와 술을 벗 삼고 서화를 팔아서 생활했다. 산수와 인물, 화조 등 모든 영역에서 뛰어났다. 이당의 준법皴法을 배웠고, 화원화가 주신周臣에게 남종화를 배웠다. 오파吳派의 문인화풍의 완성에 영향을 주었고, 오중사재자吳中四才子라 불렸다. 심주, 문징명, 구영과 함께 명사가明四家로 불린다. <맹촉궁기도孟蜀妓圖> <추풍환선도秋風紈扇圖>는 당인의 대표적인 작품이다. <맹촉궁기도>의 인물 형상은 매우 아름답다. 용필은 정연하고 섬세하며, 색의 표현은 교묘하고 자연스러우면서도 층차가 풍부하다. 진홍수陳洪綬(1599~1652) 남진南陳은 진홍수의 칭호이며, 자는 장후章侯, 호는 노련老蓮이다. 명말 청초 때 절강성 제기諸曁 출신으로, 어릴 때 이름은 연자蓮子이며 서안胥岸라고도 한다. 국자감생國子監生을 지냈다. 명이 망할 때 청 군대의 포로가 되어 목숨을 위협받았지만 지조를 지켜 그림을 그리지 않았다. 최자충과 더불어 남진북최라는 칭호를 들을 정도로 그림을 잘 그렸으며, 그를 따르는 많은 아류를 만들었다. 그가 그린 남성 인물의 형상은 웅장하고 위엄이 넘치며, 여성 인물은 허리와 목이 가늘고 자태가 우아하며 부드럽다. 그의 다른 인물화 작품들은 실제 형상과 비슷하게 그려야 한다는 고정관념을 벗어나 적당한 과장과 변형 수법으로 인물의 개성과 특징을 더욱 두드러지게 표현했다. 선의 운용은 간결하고 소박하며, 구륵은 금석같이 힘이 넘쳤다. 설색은 예스러운 아담함이 느껴지며 독특한 예술적 특색이 있다. 대표작으로 <수호엽자水滸葉子>, <귀거래사도歸去來>, <승암잠화도升庵簪花圖> 등이 있다. 최자충崔子忠(1574~1644) 명 말기 순천부順天府 출신이며, 초명은 단丹, 자는 개여開予, 도모道母이며, 호는 북해北海, 내양萊陽이다. 숭정崇禎 때 제생諸生이 되었다. 명의 멸망으로 굴에 살다가 굶어죽었다. 진홍수와 어깨를 나란히 하여 남진북최로 불렸으며, 그의 화풍은 진홍수와 비슷하면서도 풍자적인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또한 인물화를 잘 그렸는데 당나라 화풍을 변형시켜 색다른 그림을 그렸다. 최자충, 진홍수는 창조 정신이 강했으며 절파浙派와 오문화파 양대 화파와는 다른 독자적인 예술의 길을 개척했다. 대표작으로는 <동음논도설법도桐蔭論道說法圖>, <야연도夜宴圖>, <운중옥녀도雲中玉女圖> 등이 있다. 청대 인물화가 중 일부는 전문적으로 조정에서 그림을 그렸다. 대표적으로 초병정焦秉貞, 정관붕丁觀, 요문한姚文瀚, 김정표金廷標 등이 있다. 그들은 주로 황실 가족과 공신, 역사적 사건을 회화의 대상으로 삼았다. 화풍은 정연하고 섬세하며, 예법과 제도를 중요시했다. 낭세녕世寧 같은 일부 외국 출신 화가도 있었다. 궁중 화가들 외에 황신黄慎, 나빙羅聘, 개기改琦, 소육붕蘇六朋, 비단욱費丹旭 등의 화가도 인물화에 능했는데, 화가마다 자신만의 화풍을 지니고 있었다. 그 중 개기와 비단욱은 사녀도에 능했다. 그들의 사녀도는 용필이 가볍고 가늘며 유창하고, 설색이 청아하며, 먹선이 깔끔하고 깨끗하다. 인물의 형상은 대부분 섬약하고 교태를 부리며, 늘 애수에 잠긴 듯 감성적인 모습을 하고 있다. 두 화가를 개비라고 불렀는데 후에는 또 따로 개파改派와 비파費派를 이루 어 한때 풍조를 이루기도 했다. 청 말기에 인물화에서 돌출한 성과를 거둔, 창조력이 뛰어난 화가는 해상삼임海上三任이라 불리는 임웅, 임이, 임훈任薰 세 사람이다. 그들은 쇠퇴기에 처한 인물화를 다시 끌어올리는 데 공헌하였다. 임웅任熊(1823~1857) 절강성 소산蕭山 출신이며, 자는 위장渭長, 호는 상포湘浦이다. 소싯적 향학鄕學에서 초상을 시작으로 상해에서 그림을 팔면서 명성을 얻었다고 한다. 그는 산수화도 곧잘 그려서 산수인물책에 수록된 인물이다. 그의 동생인 임훈, 아들인 임예任預 모두 그림으로 이름을 날렸다. 또한 임이는 일찍이 임웅을 따르면서 그림을 배웠다고 한다. 임웅, 임훈, 임예, 임이를 사임四任이라고 부른다. 임웅은 진홍수의 예술적 수법을 계승하는 동시에 새로운 기법을 추가해 독자적인 화파를 이루었다. 그의 인물화는 용필이 무겁고 힘이 있으며, 설색이 무게감 있고 농후하며, 형상이 과장적이고 인물은 생기가 넘쳤다. 대표작으로는 <자화상自畵像>, <주성이소상周星小像>, <마고헌수도麻姑壽圖> 등이 있다. 임이任(1840~1896) 청나라 절강성 월주越州 산음山陰 사람이며, 자는 백년伯年, 호는 차원次遠, 소루小樓, 효루曉樓이다. 열다섯 살에 상해로 이사해 살았으며, 아버지인 임성학任聲鶴은 그림을 잘 그렸는데, 특히 초상화를 잘 그렸다. 임이는 집안 대대로 전하여 화법을 배워 산수화와 인물화에 능통하였으며 화초는 송의 쌍구화법을 따랐다. 임이는 진홍수에게 사사하고 임웅과 임훈으로부터 회화를 배웠다. 또한 전통을 계승하고 여러 화가의 장점을 융합하였으며 서양화의 기법들도 흡수하여 독자적인 화풍을 형성하였다. 그중 <군선축수도群仙祝壽圖> 12폭 병풍에 48명의 신선이 서왕모西王母*의 수연壽宴에 참석하러 가는 광경을 그렸다. 장면은 웅장하고, 인물들은 서로 엇갈리면서도 질서정연하게 배열되었으며 서로 호응하고 있다. 또한 나무, , , , 바위, 건축물, 바다, 안개 등도 적절하게 그려져 인물들과 조화를 이룬다. 전체적인 그림은 금빛 찬란하고 내용이 풍부하고 층차가 분명하며 색채가 밝고 선명하며 조화롭다. 청 말기 인물화의 걸작이다. 대표작으로 <화축삼다도華祝三多圖>, <동진화별도東津話別圖>, <군선축수도>, <여왜련석女媧煉石>, <애련도愛蓮圖> 등이 있다. 서왕모는 도교에서 선녀를 관장하는 여제로, 죽음과 형벌을 주관하는 반수반인의 여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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